46주차 화요일_뇌의 경고파업과 기숙사의 방문서비스

안녕하세요. 도리입니다. 

저는 지금 'walking dead’상태입니다. 2주 동안 붙잡고 있었던 서론챕터를 오늘 새벽에 겨우 털고 몇시간 자고 일어나 있는 상태거든요.

그래도 오늘 새벽까지는 working dead였으니깐, 죽은 채로 일하는 것보다는 죽은 채로 걸어다니는 게 낫죠. 원래는 44주차에 서론수정을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이리저리 갈피를 못잡고 있다가 '한 주만 더쓰면 되겠지‘ 라고 생각해서 45주차 1주일를 더 투자하고 교정자한테도 일주일 미룬다고 말해 놨는데, 결국 목요일이 되서야 수정된 서론의 개요가 겨우 나오고, 금, 토, 일 영어로 바꿔쓰려고 했지만, 만두 만들고 사람들이랑 놀면서 여유부리고 허둥지둥 하다가 결국 월요일 아침에 원고 데드라인을 하루만 더 미뤄달라고 사정해서 화요일 새벽 6시에 겨우 원고를 털었습니다. 원래는 44주차에 서론 수정을 끝내고, 지금 쯤이면 다른 챕터들도 수정에 들어갔을 줄 알았는데 왠걸.. 서론도 생각했던 내용을 다 담아내지 못하고 일단락냈네요. 교정자에게는 지금은 여기까지가 최선이고, 일단 다른 챕터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할 것 같다고 써놨습니다....에효.

원래 대로라면 오늘, 그러니깐 원고를 내고난 직후 하루 이틀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기입니다. 보통은 원고를 뽑아내기 위해서 제출 직전 며칠 동안은 밤새고 불규칙한 생활을 합니다. 정말 급할때는 밥지어먹고 소화시킬 여유도 없어서 유동식(단백질 파우더)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새벽에 잠들지 않으려고 야식 같은걸 때려넣기도 하죠.. 정말 빨리죽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의 행동수칙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ㅠ 그렇게 살다가(read 죽어가다) 챕터 하나를 털고나면, 한 이틀은 밀린 집안일과 장보기, 하고 싶었던 운동 같은걸 하면서 회복의 시간을 가집니다. 날씨가 좋은 여름시즌에는 수영장/사우나를 가거나 등산을 하거나 롤러 스케이트를 타거나... 완전 상팔자...이긴 하지만, active recovery 방식이 그냥 침대 위에서 퍼져있는 것보다 훨씬 낫더라구요. 이전 까지는 데드라인에 원고를 보내고 나서 한 2-3일 뒤에 지도교수와의 미팅이 잡혀 있기 떄문에, 원고를 내는 주는 사실상 휴식의 1주일입니다. 

그런데!!!!!!! 저는 논문을 1월 초에 내야하고, 이미 일정은 늦어지고 있고, 수정할 챕터가 아직 6개나 남은 터라(그 중 챕터 1개는 90페이지;;) 도저히 쉴 수 있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잘 때 점심때는 일어나서 다음 챕터를 시작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오늘 뇌가 '경고파업'에 들어갔습니다.ㅠ 분명히 눈은 뜨고 있는데, 뇌가 수행하는 기능의 일부가 작동을 안합니다.. 사고 및 판단과 관련되는 기능이 정지된 것은 물론이고, 그냥 피곤하기만 하고, 짜증나고, 무엇도 하고싶은 의욕이 안생깁니다. 

아, 내가 잊고있었구나. 뇌도 신체기관인데, 팔다리 근육처럼 많이 쓰면 피곤한 게 당연한데. 

그리고 '의지력’은 하고 싶다고 무한정으로 발휘되는 게 아니라 관리해야 하는 자원이라는 거. 의지력의 한계점을 계속 시험해야 하는 박사과정을 하면서 깨닫게 된 사실입니다.

'두뇌 총파업'처럼 너무 피곤해서 잠을 자느라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경고파업은 '파충류의 뇌’만 가동되는 상태입니다. 겉모습은 영장류이지만, 너무너무 피곤해서 사고기능과 판단력은 물론이고, 감정이나 공감능력도 극도로 저하되어 있는 파충류나 다름없는 상태입니다. 그냥 멍때리면서 숨만 쉬고, 방바닥을 뱀처럼 기어다니거나, 악어처럼 엎드려 있습니다. 적고 보니 나쁘지 않은 삶이네요. (부럽다, 나도 파충류 하고싶다)

2주 동안 애써 쌓아왔던 수면패턴은 와장창 무너지고, 매번 뭔가를 한다고는 하지만, 결과물은 마음에 들지 않고..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과연 제시간에 (이미 제시간이 아님.ㅠㅠ 늦었음) 졸업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뭔가 배우고 있긴 한 것 같은데, 항상 스스로가 미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저는 언제쯤이면 소위 '전문가'가 되어서 한사람 몫을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심정으로는 어디라도 좋으니 월급만 받을 수 있으면 당장 일하겠습니다. 우울한데 '전문가’의 연주를 함께 듣죠. 혹독한 수련의 과정을 거쳐 전문가가 된 뒤에도, 안주하거나 자만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연주자가 인상적입니다. 영상의 제목은 'When you are Overqualified for a JOB - This Drummer is METAL AF'바쁘신 분들은 50초 정도부터 보시면 됩니다. 

정말 멋진 연주군요. 대충하는 것 같아도, 박자를 기가막히게 쪼개시네요. 곡을 정말 철저하게 분석하신 것 같아요. 이거 보고 많이 웃었습니다. 뭐가 어찌 되었든, 공부해서 뭔가를 더 알게 된다면, 배우게 된다면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요. 엊그제 논문작성 가이드 책에서 이런 문구를 읽었습니다. 

You solve it not by changing the world but by understanding it better (Booth, Colomb, and Williams 2003:  The Craft of Research, The Univ. of Chicago Press, p.59)

너는 세상을 바꾸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을 통해서 (그 문제를) 해결한다.

연구자로서의 소명과 자부심을 가지게 하는 문장이네요. 

한풀이는 여기다가 다 했으니, 툭툭 털고 이제는 다시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야 겠죠? 먼저 박사를 끝낸 사람들이 막바지가 되면 정말 눈코뜰 새 없이 바쁘고,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변수에 대처 하느라 진땀을 뺀다고 합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데요. 원래 계획보다 3개월 정도 더 체류하게 되어서 부랴부랴 각종 연장과 행정절차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9월 말에 3개월 더 남아있을지 고민할 때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게 '기숙사가 만료되서 살 집에 없다는 점이었는데요‘ 그래서 그냥 11월 말에 돌아갈까도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몽실언니가 '반대로 생각하면, 집문제만 해결하면 3개월 더 사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며, 이제까지 어렵게 버텼는데, 마지막까지 조금만 더 힘내고 마무리를 잘하자는 말에 또 설득 되었죠. 제가 고집은 센데 귀는 또 얇아요.. (뭐라는 거야)

괴팅엔은 워낙 집구하기 힘든 곳이라, 11월 이후에 살 집을 구하느라 몇주는 정말 애를 먹었는데, 몇번의 천운(!)이 겹쳐서 다른 층의 더 작은 방이긴 하지만, 같은 건물 내에서 이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루만에 여러집이 동시에 이사를 해야해서, 이사 일정이 애매 했었는데, 어제 기숙사에서 이메일이 와서 전 입주자가 퇴실하여 지금 방이 비어 있으니 이번주에 언제든지 열쇠를 받으러 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새벽에 '금요일에 받으러 가겠다'는 이메일을 보내면서, '도와주신 덕분에 기숙사에서 안정적으로 학위를 끝낼 수 있게 될 것 같고, 논문작성에 있어서 큰 도움을 얻고 있다’는 내용의 고마운 마음을 전해드렸습니다. 그런데 낮에 방초인종이 울려서 나가 봤더니, 기숙사 담당자가 다른 퇴실자의 방을 점검차 저희 기숙사에 왔다 제 방에 직접 들러서 ‚열쇠를 이번주 언제든지 받으러 와도 된다‘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길에 이메일 쓰기 귀찮아서 그냥 면대면으로 말해준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저를 기억해 주고 직접 말씀해 주신 걸 보면, 여기도 사람사는 곳이고 정이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 원래는 11월 30일에 여러 집이 동시에 이사를 나가야 하나 했는데, 예상보다 더 빠르게 이사하게 되었네요..ㅋ 저의 기숙사 연장 스토리나 기숙사 이사 후기들도 다 포스팅 할게요! 정보제공을 위해서!

그럼 오늘도 전 세계 곳곳의 박사과정들과 유학생 분들 화이팅! 저는 얼른 자고 일어나서 영장류로 거듭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