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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 괴팅엔

[P의 멍청한 실수 시리즈- 1] 파란만장 귀국길

by podami 2019. 10. 11.

안녕하세요. 이번에 괴팅겐 블로그에 참여하게 된 P입니다.  첫 포스팅으로 저의 파란만장한 귀국길을 담았습니다. 저는 어제 (2019. 10. 9일)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가 경험한 멍청한 실수를 복기하여, 다른 분들에게 조금 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씁니다.   이 글은 두 파트로 나눠집니다.

 

Ⅰ는 멍청한 실수 끝에 알게 된 소소한 정보가 있고, Ⅱ에는 귀국길에 느낀  개인적인 심경을 담았습니다. 구질구질한 개인적 이야기는 패스하고 싶으시다면 Ⅰ만 읽으시면 됩니다. 

 

 

Ⅰ. 멍청한 실수 

 

 1. 전화로 테어민 잡기 

 

 괴팅겐에서의 비자 테어민은 비자청 홈페이지에 안내된 이메일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간혹 비자 만료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거나 특수한 상황으로 빨리 테어민을 잡고 싶으신 분들은 SPRECHZEITEN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월요일부터 화요일 2시부터 3시 30입니다. 

 

https://www.goettingen.de/stadt-goettingen-wie-koennen-wir-helfen/juniorbuero.html

 

저도 전화 공포증이 있기 때문에 보통 이메일로 처리하는 편인데, 지난 6월부터는 전화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보다 의외로 간단합니다. 이름을 말하고, 내가 보낸 이메일을 체크해달로 하면 바로 가까운 시일내 테어민을 바로 잡아줍니다.

 

 

 

2. 임시비자의 종류 

 

2019년 10월 7일 (월요일) 오후 2시가 되길 기다렸다가, 2시 1분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P :  나는 지난 주에 새로운 비자에 필요한 모든 서류를 스캔해서 다 보냈어. 비자 카드 나오는데 한달이 걸리는건 알아. 하지만 내가 아파서 한국 병원에 가야하거든(구구절절 생략) 이번주에 테어민을 가급적 빨리 잡아서 한국에 방문 할 수 있게 허가를 해주면 안될까??? 

공무원 A:  응? 허가가 왜 필요해? 지금 너는 언제든지 여행 할 수 있는 비자인데?  네 임시비자는 12월까지잖아. 

P :  ??? 아니야. 저번에 네 동료가 나에게 다시 테어민을 잡으면 여행 가능한 임시비자를 준다고 했어. 

공무원 A: 아, 아무래도 그녀가 착각한 것 같아. 너의 임시비자는 (§ 81 Abs. 4 AufenthG)  이고, 언제든지 나갈 수 있어. 너는  언제든지 한국에 갈 수 있었는데? 

P: ???????????????? 롸?

 

 

네, 그렇습니다. 제가 9월에 발급받은 임시비자는 (§ 81 Abs. 4 AufenthG) 로 언제든지 출국이 가능한 비자였습니다. 만약 제가 이 정보를 정확하게 알았다면, 열흘 전에는 한국으로 올 수 있었을 것이고, 좀 더 빨리 병원투어를 마치고 독일에 돌아와 공부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담당 공무원의 말 혹은 인터넷 커뮤니티의 글만 믿고 스스로 확인해보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테어민 없이는 독일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생각에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비행기표를 예매하지도 못하고, 병원 예약도 하지 못했습니다.

 

공무원이 실수를 할 수도 있고, 또한 인터넷에도 여러 불명확한 정보가 범람하므로 꼭 스스로 확인을 해보시길 추천합니다. 

 

https://de.wikipedia.org/wiki/Fiktionsbescheinigung

 

이 페이지에 따르면, 임시비자는 크게 세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 81 Abs. 3 Satz 1 AufenthG, 
§ 81 Abs. 3 Satz 2 AufenthG, 
 § 81 Abs. 4 AufenthG 

 

 

무비자에서 정식비자를 신청 한 경우에는,  81.3 에 해당되어   독일 내에 체류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미 다른 정식비자를 갖고 있고, 그 종류를 바꿀 때에는  § 81 Abs. 4 AufenthG 를 받아서 여행이 가능합니다. 

 

제가 공무원 말만 무턱대고 믿지않고, 단 한번이라도 제 임시비자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하고 귀찮음을 감수하고 독일어로 안내된 여러 상세한 정보 글을 꼼꼼히 확인했더라면, 많은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었겠지요.

 

앞으로 연재 될 P의 멍청 시리즈에(멍청 시리즈라 쓰고 삽질 시리즈라 읽)  비하면 출혈이 크지는 않았지만, 또 한번 깨달았습니다.  "너란 인간 참 한결같이 안이하다? 아주 꾸준해! " 

 

 

 

 3. 비행기표 구매 

 

 

 멍청한 실수를 또! 저질렀다는 것에 스스로가 괘씸한 것도 잠시, 더 시간을 낭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비행기표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전화를 한 것은 10월 7일 월요일 오후였고,  저는 약 한 시간의 서치 끝에 바로 다음날인 10월 8일 비행기표를 구매합니다. 

 

 

많이 알려진대로, <화요일>이 보통 가장 저렴합니다. 가장 적은 비용으로  귀국하고 싶으시다면, 중국동방항공사를 이용하고 화요일 출발을 끊으시면 됩니다.  비수기 기준 78만원 정도입니다.   경유시간도 2시간 정도라서 크게 직행 비행기와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악명 높은 상항이 푸동 공항에서 환승을 해야하는 스트레스는 감안하셔야 합니다.

 

 

 저에게는 두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당장 내일인 10월 8일에 몇십만원을 더 내고 아시아 직행으로 갈 것인가, 10월 15일에 중국동방항공으로 78만원에 저렴하게 올 것인가?! 

 

저는 연인과 가족을 보고 싶은 마음, 그리고 욱신욱신 거리는 치아와 작년에 수술 받음 병원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 그리고 당장 가서 새우치킨을 먹고 싶은 (사실 본질적인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 혼재된 욕망을 비교형량하여, 빠르게 다음 날 비행기를 바로 결제 했습니다. 

 

 

Ⅱ. 개인적인 감상 

 

* 여기서부터는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들로, 딱히 정보성 글은 없으니 패스하셔도 됩니다. 

 

1. 비대해진 유학생에게 엄습한 공포 

 

 

 비행기표를 구매하고 나서 설레는 마음도 잠시, 저는 몇시간 후에 벌어질 상황에 대해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고 순간 끔찍해졌습니다.

 

저는 독일에 와서 살이 많이 쪘습니다. 이것은 약간 병리적인 현상으로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여러 스트레스에 노출되고 심리적으로 취약해지고 정신적으로 허기져 먹는 것으로 지난 1년 반 가량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비대해진 제 자신과 거울앞에 마주하고는 한국 공항에 떨어졌을 때 마중나왔을 때 애인의 실망한 모습과, 구박 할 가족과 친지들의 얼굴이 아른거렸습니다. 짐을 싸보려고 뒤져보니, 당연히 살이 쪄서 변변한 옷은 없었고, 종료시간 1시간 남은 독일 옷가게에 가서 옷을 닥치는 대로 사왔습니다.

 

 

그나마 독일은 큰 사이즈들의 의류가 많기 때문에, 당장 입을 옷들을 빠르게 샀습니다. 40분만에 쇼핑을 마친 후에는 DM에 가서 비타민, 당근 오일, 초콜릿 등을 쓸어 담아왔습니다.

 

대 가족들에게 한 두개씩이라도 나눠줘야 한다는 생각에 낑낑대며 짊어지고 왔지요. 그렇게 짐을 싸고 해가 동터오고 처리해야 할 이메일들을 보낸 후에, 잠을 한 숨도 못자고 괴팅겐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Flixbus를 탔습니다. 

 

 

 

2. 공항에 가니 괜시리 슬프네 

 

 

공항 내 스벅에서 비행기 기다리며 혼자 당근 케이크를 냠냠

 

 

공항에 도착해서 수속을 밟고 스타벅스에 앉아 당근케이크도 먹으며 호사를 누렸습니다. 괴팅겐에는 스타벅스가 없습니다.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한국어가 계속 들렸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장성한 자식 둘과, 부모님들이 함께 여행하는 모습을 보니 괜시리 슬퍼져서 눈물이 찔끔 났습니다.

 

 

 복잡한 감정이었는데, 그것은 경제적 차이에서 오는 부러움과 외로움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함께 유럽여행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패키지 관광으로 한번 다녀와보셨고, 아버지는 출장 말고는 해외여행을 거의 가보시질 못했습니다. 가족 단위로 유럽여행을 한다는것은 제게는 어떤 '부'와 '여유로움'의  상징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제는 하고 싶어도 부모님이 일흔이 넘으셔서 연로하시고, 아직도 은퇴하지 않으시고 일을 하시는 아버지는 심정적 여유가 없습니다. 어머니의 소원은 제가 박사를 마칠 때 즈음에 함께 유럽여행을 해보는 것이었는데,

 

어머니에게 말하지 못한 진실은, 

 

그것은 정말 먼 훗날이 될 것이며, 기약도 없고, 알 수도 없으며 그때쯤 어머니의 무릎이 성할지 저는 장담 할 수 없다는 것이었죠. 

 

약간의 미안함, 죄책감, 부러움 등이 섞여서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그것은 지난 날의 집안 사정의 어려움과, 그리고 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이런 것들이 혼재되어 한꺼번에 다가왔습니다. 

 

저는 현재 자급자족 유학생으로 살고 있습니다. 가끔 이곳에 알바를 하면서 유학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 질문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딱히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유학생활에서 돈은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유학을 위해 일을 해 돈을 저축해서 왔고, 그래서 남들보다 늦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남들보다' 라는 기준은 매우 모호합니다. 누군가는 유학을 20대초반에 시작 할 수도 있고, 20대 중후반 등 다양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통념적인 '학생'이라고 생각되어지는 나이에서 훌쩍 지나 저는 시작했기 때문에, 유학이 끝났을 때의 시점의 나이에 대해서도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제 생계를 위한 알바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노곤합니다.

 

 

비효율적이고 인생이 더디게 흘러가는 느낌이 있어서,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지치는 느낌이 듭니다. 생존 자체도 힘든데, 그 생존을 위한 땔깜을 떼우기 위해서 장작을 계속 피우다보면, 정작 해야 할 것에 집중을 못하기도 합니다. 가급적 매우 똑똑하고 유능해서 Dori님처럼 장학금을 받으시거나 아니면 집에서 유학자금을 지원받으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장점으로는, 정신적으로 노곤하면서도 자유로운 부분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로움에서 오는 편안함 보다는 속된 말로 '쫄리는' 부분이 크기 때문에,  성공적인 유학생활을 위해서는 충분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3. 한국에 오니 집도, 엄마도 사라졌네

 

 

 11시간의 비행기를 타고 내린 인천공항, 저는 내리기 30분전에 허겁지겁 얼굴을 세수하고 분칠을 조금 했습니다. 기내에서는 냉장고바지에 가장 편안한 차림으로 있다가, 내려서 미리 준비해둔 새 원피스와 검은 스타킹 (다리를 조금이라도 얇아보이고 싶었지만, 15kg가 쪘기 때문에 솔직히 감출 수도 없습니다. ) 구두를 꺼내고 좀 몰골을 재정비한 후 활짝 웃으며 나갔습니다.

 

 

멀리서 마중을 온 연인에게 쿵쿵 거리면서 뛰어갔습니다. 한 마리의 코끼리가 뛰어오는 것 같았겠지만, 제 연인은 절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현재 둘 사이의 금칙어는 '살' 이기 때문에 입밖에도 그는 꺼내지 않았습니다. 마치 사이버가수 아담과 연애하듯이  10개월동안 매일 캠으로 보다가 실물로 보고 손을 잡으니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잠시.. 

 

 

본가로 가니, 집에 휑했습니다. 알고보니 저의 식구들은 여름에 모두 A시로 이사를 했던 거였죠. 제가 멀리서 공부를 하는데 스트레스를 받을까봐 말 안했다는데..마치 컬투쇼 사연에서 본, 제대하고 와서 집에 갔더니 집이 이사했더라는, 황당한 군인의 사연과 비슷했습니다.

 

 

그리고 30년 가까이 산 저의 스윗 홈은 제가 독일에 돌아가면 전세로 내놓을 것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제 정든 방, 그래도 서울에 있엇던 보금자리가 사라지고, 다음에 한국에 오면 서울에 집이 없어진다는 사실에 망연자실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만든 B언니에 대한 분노로 화가나서 집에 있는 샌드백을 퍽퍽 내리치고, 헛헛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빡칠 땐 샌드백을 칩니다. 물론 손만 엄청 아팠습니다. 

 

 작년까지는 매주마다 형부들과 조카들과 언니들이 함께 하고 온기가 가득한 집이었는데, 돌아오니 가족들은 없고 저 혼자 덩그러니 아파트에 남겨졌습니다. 

 

늙어가는 부모님과 조금이라도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그리고 집밥을 먹고 싶었던, 가족들과 자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마음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저는 지금 혼자 아파트에 남아 짠 명란젓에 깡소주를 마시면서 이 포스팅을 쓰고 있습니다. 

 

 

 아이 둘을 키우는 B언니의 고달픔을 다는 이해못하겠지만,  이미 초등학생이 된 아이들을 언제까지 부모님이 돌봐야 하는 것이며, 다른 C언니의 출산도 앞두고 있는데 꼭 그렇게 이기적으로 했어야 하는지 등 원망스럽고 힐난 하고 싶은 마음을 주체 하지 못하여 메모장에 디스랩을 잔뜩 썼습니다.

 

지금까지 메모장에 쓴 디스랩으로 입만 좀 빠르게 잘 굴렸다면 쇼미더머니 8강에는 갔을지 모르겠습니다.  메모장에 쓴 내용을 B언니에게 보냈다면, 우리는 의절할지도 모를테죠. 말로 쌓은 구업은 씻지도 못한다고 하여 보내지는 차마 다 보내지는 못했습니다. 

 

 

 4. 엄마도,할머니도 아닌 인간 이00

 

B언니는 자신이 힘들다며, 이해해달라고 했지만 저는 냉정하게 이렇게 카톡을 보냈습니다. 

 

"언니만 힘든거 아니야. 우리 모두 사는거 힘들어. 마흔에 출산하는 C언니도, 외국에서 사는 나도 힘들어. 엄마는 노년을 즐길 권리가 있어. 10년이나 봐줬으면 충분해. 황혼 육아로 엄마의 생활공간을 침범하고 뺏은건 언니야.


내가 아이가 없어서 이해 못한다고? 내가 아이를 낳을 때 즈음엔 엄마는 80에 가깝겠지? 난 그저 엄마가 그때 무릎이나 건강하고 좋아하는 책이나 실컷 읽으시게 눈이나 건강하셨으면 좋겠어. 엄마 그만 착취해

 

네, 이것은 사회 시스템의 문제 일수 있습니다. 국내에서 가장 좋은 학부를 졸업한 고학력자인 B언니는 일을 해야할테고, 국가에 이바지하기 위해서인건지, 본인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는지, 하늘의 섭리인것인지, 아이를 두명이나 낳았습니다.

 

 

엄마는 그녀의 아이들을 봐주기 위해서 황혼 육아로 60부터 70까지 보냈는데,  늙은 엄마의 짐은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고도 없어지질 않습니다. 

 

 

엄마가 공공재는 아닙니다. 하지만 외국 생활 끝에 지쳐 엄마의 따뜻한 집밥 한끼가 먹고 싶었던 저나,  출산을 앞둔 C언니는 엄마의 조언과 따뜻함이 필요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엄마에게 밥을 차려주고, 엄마가 남은 여생을 충분히 쉬면서 누리게 해드려야하는 차례인데도, 우리는 몸만 큰 어른이라 아직도 엄마를 갈구하는군요.

 

 

가장 여기서 힘든 것은 엄마일 것입니다.  대체 엄마는 어디까지 희생해야 하는 것일까요? 엄마라는 이름이 지긋지긋해지셨을 것 같은데,  이제는 할머니란 이름표까지 달고 성치않는 관절로 종종 거립니다. 결국 계속 할머니를 찾는 전화에 급하게 KTX를 타고 내려가셨습니다. 

 

 

엄마도, 할머니도 아닌 인간 이00로서의 삶은 어느 끝에나 찾을 수 있을까요?

 

 그녀는 천성이 조용한 사람이고, 책읽기를 좋아하고 바느질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조용히 클래식 음악을 듣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일흔살에도 영어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죠. 같은 종교의 사람들과 소소하게 교제하기도 합니다. 조용히 걷고 사색하기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인간 000의 삶은 어디로 실종되었을까요? 

 

 

엄마가 가시고 난 후에 엄마의 옷방에  갔습니다. 늘 재봉질을 좋아하고 핸드메이드 옷을 만들길 좋아하시던 엄마.  세상에 하나 뿐인 원피스와 코트를 만들어주시던 엄마는, 재봉틀을 닫아버렸습니다. 볕이 따뜻하게 드는 집에서 클래식 FM93.1을 들으면서  옷 만들기를 좋아하셨던 그녀의 잔잔한 행복은, 또 황혼 육아에 잠식되어 버렸습니다.  

 

 

10개월만에 본 엄마의 몸은 너무 작아지고 더 늙어져버려 마음이 아팠습니다. 누군가의 아이가 자라는 사이, 나의 엄마는 계속 더 늙어가고 있네요. 저는 착하지가 못해서 언니와 조카들을 보러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누군가의 '당연한' 희생을 먹고 자라는 아이들의 성장을 저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훌쩍 큰 키만큼 늙은 우리 엄마의 어깨는 더 작고 움츠러들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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